신용회복경험담
다음은 요청하신 조건을 바탕으로 구성한 개인회생 경험담입니다
- 최고관리자 19일 전 2025.07.25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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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무 이전, 소박하지만 행복했던 농촌의 일상
저는 전남의 한 시골 마을에서 남편과 함께 밭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50살의 여성입니다. 두 자녀는 이미 도시로 나가 직장을 다니고 있고, 저희 부부는 이곳에서 조용하고 단순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계절 따라 밭일하고, 마을회관에서 이웃들과 김치 담그고, 그렇게 하루하루가 평온했죠.
하지만 몇 해 전, 아이들 결혼자금과 노후 준비가 걱정돼 수입을 조금이라도 늘려보자는 마음에 프랜차이즈 카페 창업을 결심했습니다. “시골에도 이제 카페가 잘 된다”는 말에 혹해, 마을 입구에 자리를 얻고 운영을 시작했죠.
창업의 시작과 몰락, 점점 쌓여가는 빚
처음엔 손님이 조금씩 찾아왔고, 마을 행사 때는 단체 주문도 들어오고 해서 나름 희망이 보였어요. 하지만 6개월쯤 지나니 인근에 대형 마트가 들어서고, 시내 프랜차이즈들이 배달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손님이 뚝 끊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는 대출을 돌려막으며 운영했어요. 시설 자금으로 처음 빌린 3천만 원에, 운영비 부족으로 신용카드 현금서비스를 자주 썼고, 결국 은행 두 곳에서 추가로 5천만 원, 카드사 두 곳에서 3천만 원 넘게 쌓이더군요. 총 채무액은 어느새 1억 1천만 원까지 불어났습니다.
남편은 처음엔 “잘해보자”고 했지만, 점점 말수가 줄고, 결국 “이제는 접자”는 말을 꺼냈습니다. 문을 닫고 나니 남은 건 어마어마한 빚과, 매달 밀려오는 독촉장뿐이었습니다.
무너지는 마음 속, 마지막 선택이 된 개인회생
가장 괴로웠던 건 카드사에서 집으로 온 독촉장이었습니다. 한 번은 우체국 직원이 아들 앞에서 등기를 전해줬고, 그날 아들은 전화로 “엄마, 무슨 일 있어요?” 하고 묻더군요. 그 말을 듣고,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이었어요.
개인회생이라는 제도를 알게 된 건 인터넷 검색을 하다 우연히 본 글 덕분이었습니다. 반신반의하면서도 상담을 받으러 나갔고, 상담실 문을 열던 그 순간의 떨림은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부끄러움과, “정말 가능할까” 하는 불안이 뒤섞여 있었죠.
하지만 상담사는 제 상황을 자세히 듣고, 정식으로 신청하면 인가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말해주었어요. 그렇게 상담을 받은 후 두 달간 서류를 준비하고, 법원에 접수했습니다.
5년의 시간표, 다시 희망의 시작
개인회생이 인가되기까지 총 6개월 정도 걸렸습니다. 그 사이 법원 출석도 한 번 있었고, 채무의 진위 여부와 변제 능력을 검토받는 과정은 긴장의 연속이었지만, 끝내 인가 결정을 받았을 때 눈물이 났어요.
저는 총 60개월, 매달 약 27만 원씩 변제하는 계획으로 승인받았습니다. 지금은 2년이 조금 넘게 지난 상태고, 성실히 납부 중입니다. 수입이 일정치 않은 농업 종사자라 계절 수입에 따라 월 변제금이 부담될 때도 있었지만, 지출을 줄이고 작은 일거리도 찾아가며 어떻게든 유지하고 있어요.
변제 계획이 시작된 이후, 독촉 전화는 사라졌고 잠도 잘 수 있게 됐습니다. 무엇보다 남편과의 대화가 다시 늘어나고, 자녀에게도 당당해졌습니다.
다시 짓는 삶, 그리고 전하고 싶은 말
이제는 다시 밭에 나가 일하며, 한 푼 두 푼 모으는 삶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직 3년 가까운 변제 기간이 남아 있지만, 예전처럼 매일 불안에 떠는 날은 아닙니다.
개인회생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책임지기 위한 선택이고, 다시 살아보겠다는 의지라고 생각해요. 저처럼 실패를 경험하신 분들께 꼭 말해주고 싶습니다. “빚보다 중요한 건 당신의 삶이고,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요.
저는 지금, 다시 한번 씨앗을 심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 씨앗이 언젠가 열매를 맺을 거라 믿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