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회복경험담
논밭에서 시작된 희망, 다시 살아가는 중입니다
- 최고관리자 6일 전 2025.08.07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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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했던 농촌의 일상
저는 충청도 시골에서 50년 넘게 살아온 평범한 농부입니다. 남편과 함께 벼농사와 과수원을 꾸리며 살고 있었고, 자녀 둘은 도시에 나가 각자 꿈을 찾아가는 중이었죠. 비록 수입이 넉넉하진 않았지만, 큰 욕심 없이 묵묵히 살아가는 삶이었습니다. 봄이면 모내기 준비에 바쁘고, 가을이면 추수한 곡식을 정리하느라 쉴 틈이 없었지만, 흙 냄새와 햇살 아래서 일하는 것이 저에겐 행복이었어요.
자녀 유학으로 시작된 빚
그러던 어느 날, 큰아이가 미국에서 유학하고 싶다는 말을 꺼냈습니다. 대학 졸업 후 진로에 대해 고민하던 아이였기에, 부모로서 응원해주고 싶었어요. 남편과 상의 끝에 대출을 받아 유학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은행에서 5천만 원, 카드사에서 3천만 원 정도를 빌렸습니다. 처음에는 “농사 지으며 조금씩 갚으면 되겠지” 싶었죠.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였습니다. 유학 생활에는 생각보다 많은 돈이 들었고, 환율도 오르락내리락 했습니다. 소득은 늘 제자리였고, 몇 해 연속으로 태풍과 장마 때문에 작황이 나빠 수입이 크게 줄었어요. 밀린 이자에 연체까지 겹치면서, 어느새 빚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됐습니다. 밤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도시에 있는 자식들에겐 내색도 못 하고, 속만 끓였죠.
결심의 순간
결정적인 계기는 신용카드 연체로 연체 독촉장이 집으로 날아온 날이었습니다. 그날은 농한기라 집에 있던 남편이 우편을 먼저 열어봤고, 저와 둘이 마주 앉아 아무 말 없이 한참을 앉아 있었어요. “이렇게 계속 끌고 갈 수는 없다”는 말에 처음으로 개인회생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습니다.
사실 그전에도 인터넷으로 슬쩍 찾아본 적은 있었어요. 하지만 어쩐지 창피하고, 실패자 같다는 마음에 바로 닫아버리곤 했죠. 몇 달을 고민했지만, 더 이상은 버틸 수 없다고 느꼈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조심스럽게 털어놨더니 “요즘은 다들 그런 거 한다더라”는 반응이 돌아왔고,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졌어요. 결국 용기를 내어 상담을 받으러 시내로 나갔습니다. 처음엔 너무 떨리고, 내가 이런 상황까지 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어요.
개인회생 절차의 시작과 극복
상담부터 법원 인가까지는 약 5개월이 걸렸습니다. 소득 증빙이나 재산 내역, 채권자 목록을 정리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더라고요. 농업 소득은 불규칙하다 보니 월 평균 수입을 정리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고, 자료를 하나하나 모으느라 며칠을 새벽까지 앉아 있었습니다.
다행히 법원에서 개인회생을 인가해주었고, 현재는 매달 30만 원씩 3년간 갚는 변제계획이 진행 중입니다. 총 1,080만 원만 상환하면 되고, 나머지는 면책될 예정이라 숨통이 트였어요. 법원 출석 당시에는 손이 덜덜 떨릴 정도로 긴장했지만, 판사님도 차분하게 설명해주시고 무례한 질문은 전혀 없었어요.
가장 힘들었던 건 “내가 실패한 건 아닐까”라는 자책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가족의 응원이 큰 힘이 됐습니다. 남편은 묵묵히 곁에서 함께 자료를 정리해줬고, 자식들은 “엄마 미안해요, 고맙고 사랑해요”라고 문자 하나 보내주었죠. 그 한마디에 다시 일어설 힘이 생기더군요.
다시 희망을 심으며
지금은 변제를 시작한 지 1년이 넘었고, 계획대로 착실히 갚아가고 있습니다. 예전처럼 큰돈을 벌진 않지만, 마음은 훨씬 가볍습니다. 신용카드는 사용하지 않고 현금으로만 생활하면서 씀씀이는 더 알뜰해졌고, 남편과 함께 마을 농산물 온라인 판매를 준비하고 있어요.
“내가 무너지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개인회생은 저에게 또 하나의 시작이었습니다. 실패가 아니라 다시 살아볼 기회를 주는 제도라고 생각해요.
혹시 저처럼 자식 걱정에, 생계 걱정에 마음이 무너져가는 분이 계시다면, 용기 내시길 바랍니다. 잘못된 선택이 아니라, 더 나은 내일을 위한 선택입니다. 저처럼, 당신도 분명히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